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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꿀팁

다함께 중국차 | 중국의 시대별 차(茶) 문화 및 특징 총정리 (feat. 중국 차문화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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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차 문화는 역사가 깊은 만큼 시대별로 뚜렷한 특징을 보인다. 지난 시간에 다뤘던 육우(陆羽)가 집필한 다경(茶经)이라는 책에는 시대별 차문화가 아주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오늘은 다경(茶经)을 기준으로 중국 시대별 차문화의 특징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주(周), 진(秦), 양한(两汉) 시대의 차

동진(东晋) 시대의 상거(常璩)가 편찬한 <화양국지(华阳国志)>에는 '주나라 무왕에게 파촉 일대에서 차를 공물로 바쳤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파촉 일대는 현재의 운남, 귀주, 사천 등지로 야생대차수가 집중 분포하는 지역이다. 해당 기록은 차를 공물로 바친 사실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춘추 시대 제나라 안자의 언행을 모아 후세 사람이 기록하여 편찬한 <안자춘추(晏子春秋)>에는 '제나라 경공 때 재상을 지낸 안영은 거친 밥과 구운 고기 세 꼬치, 다섯 개의 알과 차나물을 먹을 뿐이었다'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통해 찻잎을 반찬으로 만들어 식용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Photo by aboodi vesakaran on Unsplash

 

주(周), 진(秦), 양한(两汉) 시대의 차는 조정에 바치는 공물 중 하나였으며, 시간이 흘러 사람들의 일상생활 속에 자리잡은 음용 및 식용 식품이었다. <동약(僮约)>과 <식론(食论)>의 기록에 따르면 주, 진, 양한 시대에도 차를 매매하는 무역의 초기 형태가 성립되어 있었다고 한다.

 


삼국(三国), 양진(两秦), 남북조(南北朝) 시대의 차

삼국시대에는 차로 손님을 접대하는 풍습과 함께 사회적인 풍조의 영향으로 차로 술을 대신하는 이차대주(以茶代酒)의 문화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문화 유행의 기저에는 차로 청렴을 기른다는 사상이 깔려 있었다. 삼국지(三国志)에는 '차를 내려 술을 대신하였다'는 고사가 기록되어 있기도 한데, 이는 이차대주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Photo by 五玄土 ORIENTO on Unsplash

 

남북조 시대에 이르러서 차는 기호품으로 변화하였다. 북조(北朝)는 남조(南朝)에 비하여 음차 문화가 대중적이지 않았는데, 효문제(孝文帝)의 한화정책(汉化政策) 이후에 북조로 귀순하는 사람들이 증가하며 음차 문화가 남조의 음차 문화가 북조로 전파되었다. 

 

남조(南朝) 시기의 차는 정신을 닦는 음료의 특징이 뚜렷하게 보인다. 선종불교의 영향으로 승려들이 수행을 하는 과정에서 오는 졸음과 잡념을 떨치기 위해 차를 마시는 경우가 많았고, 차는 더 깊은 단계의 수행 또는 명상에 들기 위해 사용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차의 향과 맛, 색보다는 차가 가진 '청렴한 기운' 자체를 활용하여 자신의 정신을 밝히는 용도로 활용된 것이다. 

 


당(唐)나라 시대의 차

당나라 시대에는 차 문화가 비약적으로 부흥하기 시작했다. 음차 문화는 일상적인 현상으로 자리를 잡았고, 육우(陆羽)의 다경(茶经)이 편찬된 시기이기도 하다. 당나라에서는 납작한 원형의 병차(饼茶)를 공물로 바쳤는데, 이를 갈아 더운물에 타서 마시거나 큰 솥에 끓여먹는 자차법(煮茶法)과 전다법(煎茶法)이 유행하였다.

 

궁락도 / 작자 미상

 

궁락도는 사녀(仕女)들이 상에 둘러 앉아 차를 즐기는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당나라 시대의 차 문화를 잘 나타내고 있다. 이 그림에서는 차를 떠서 자신의 잔에 담는 모습, 차를 굽는 모습, 차를 마시며 즐기는 모습 등 차를 음용하는 생동감 넘치는 장면을 구경할 수 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당나라 시대에는 병차(饼茶)가 유행했는데, 차를 마시기 위해서는 차를 불에 굽고 맷돌로 곱게 갈아 가루를 내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리고 나서 큰 솥에 넣어 차를 끓이고 달인 뒤에 차를 마셨는데, 궁락도에는 당시의 차를 마시던 음용법인 자차법(煮茶法)이 잘 묘사되어 있다.

 


송(宋)나라 시대의 차

중국 역사에서 최고의 문화 전성기였던 송나라 시대의 차 문화는 어땠을까? 음차 문화 역시 송나라 시대에 이르렀을 때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송나라 시대의 차는 학문과 기예 영역이 크게 발달하여 예술로 승화된 특징을 갖는다. 사대부들 뿐만 아니라 서민들도 다관(茶馆)에 모여 차를 즐기는 게 보편적인 문화로 자리 잡은 시대였다.

 

<몽양록(梦梁录)>에는 개문칠건사(开门七件事)라고 하여 '盖人家每日不可阙者, 柴米油盐酱醋茶. (집에 없으면 안 되는 7가지의 물건이 있으니, 땔감, 쌀, 기름, 소금, 간장, 식초, 차가 바로 그것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를 통하여 일반 서민의 삶에도 차가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투차도 / 유송년

 

송나라 시대의 음차 방법은 점차법(点茶法)이 유행하였다. 음차 방식의 변화는 차의 형태의 변화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당나라 시대에 유행했던 병차(饼茶)는 송나라 시대에 이르러 말차(末茶), 산차(散茶) 등의 형태로 변화된다. 이전에는 긴압되어 있는 차의 형태 때문에 차를 굽고 맷돌에 갈아 가루를 만든 뒤 큰 솥에 넣어 끓이는 주차법(煮茶法)이 유행했다면, 말차와 산차가 등장하며 현대 말차의 음용 방법과 아주 유사한 점차법(点茶法)이 유행하게 된 것이다.

 

차 문화가 황금기를 맞이하면서 누가 차의 색과 향, 맛을 잘 내는지를 겨루는 투차(斗茶) 풍조가 크게 일어나기도 했다. 당시 투차에서 최상급으로 평가하던 차의 기준은 <북원다록(北苑茶录)>, <다록(茶录)>, <대관다론(大观茶论)> 등과 같은 서적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원(元)나라 시대의 차

원(元) 나라는 몽골족이 세운 왕조이다. 여태까지의 한족이 아닌 소수민족이 나라를 세우다 보니 한족 문화에 대한 핍박이 거세진 시기이기도 하다. 당시 몽골족에게 차를 마시는 행위란 말 그대로 차를 통해 자신들이 원하는 영양소를 얻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행위였다. 때문에 송(宋) 나라의 화려하고 예술적인 차문화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한족 역시 이러한 문화적 핍박의 영향을 받아 차의 예술적인 부분을 경쟁하던 투차(斗茶)에서 차 자체를 즐기는 문화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주원장이 명(明) 나라를 세우기 전까지 약 100여 년 간 중국 차문화는 침체기에 들어가게 된다.

 

Photo by Paul-Vincent Roll on Unsplash

 

차의 형태 역시 변화를 맞이했다. 민간에서는 산차(散茶)를 주로 음용했고, 공물로는 병차(饼茶)와 단차(团茶)가 주요한 역할을 했다. 찻잎의 제다법에도 초청(炒青)이라는 새로운 기술이 생겨났고, 기계를 이용한 제차 방법이 사용되기도 했다. 현재 사용되는 6대 다류의 기준도 이때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명(明)나라 시대의 차

명(明) 나라를 만든 주원장은 부패척결을 위하여 차의 밀수출을 금지한 왕으로 유명하다. 그의 사위였던 구양륜이 유일하게 차 밀수업을 운영한 사람이었으나 훗날 그에게 폭행을 당한 검문관이 그를 조정에 밀고하며 밀수출 행위가 발각되게 되었고, 사형을 당하며 밀수 행위는 사라지게 되었다고 한다.

 

 

명나라에 들어서 중국의 차 문화는 새로운 황금기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평가가 많다. 왜일까? 우리는 그 힌트를 차의 형태와 음차 방법에서 찾을 수 있었다. 당시 주원장은 단차(团茶)가 이민족들이 세운 원나라가 좋아했던 차이고, 차를 생산하는데 드는 수고스러움이 많다는 이유로 단차의 생산을 금지시켰다. 하지만 차를 마시는 행위 자체를 금하기는 어려웠기에 새로운 형태의 차인 산차(散茶)로 이를 대체했는데 차의 형태가 바뀌자 차를 마시는 형태도 바뀌게 된다.

 

 

이전까지는 차를 마시는 방법이 전차(煎茶)였던 반면, 명나라에 이르러서는 포음(泡饮) 방법으로 차의 음용법이 변화한다. 이싱(宜兴) 지역의 자사차호(紫砂茶壶)가 발전하기 시작한 것도 명나라부터이다. 송(宋) 나라 시대의 투차(斗茶)의 풍조가 심화되기도 했고, 정화라는 인물이 바닷길을 개척하면서 중국 차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다.

 


청(青)나라 시대의 차 

명나라 시대부터 이어온 차문화로 인해 청나라 시대의 백성들에게 차를 마시는 행위는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산차(散茶)를 우려 마시는 포음(泡饮) 법이 여전히 성행했고 전통도 유지되게 된다. 차 생산도 날개를 달아 프랑스, 영국과 같은 국가에 수출을 하기 시작하는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영국과의 아편전쟁, 그리고 중일전쟁 등으로 인해 청나라가 정치적, 경제적으로 쇠락하며 차문화 역시 쇠락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아편전쟁을 비롯하여 차로 인해 발생된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는 이후에 다시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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